books2004. 5. 5. 17:48



베르베르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이야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단편소설이 아니라 이야기 말이다. 독자들 곁에서 이야기들을 가만가만 들려주고 싶은 기분으로 이 글들을 썼다는 그의 말마따나 소위 말하는 '문학적 완결성'에 집착하지 않는 그의 '이야기들'은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친절한 어느 대머리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편하면서도 그냥 흘려 듣기엔 아까운 메시지가 있다.

지금까지 베르베르의 소설들이 그랬듯이 이 작품집의 이야기들도 기발한 착상에서 시작한다. 「내겐 너무 좋은 세상」에서의 그 세상은 자명종, 실내화, 커피 메이커 같은 모든 물건이 로봇이 되어 지각을 할 수 있고,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말을 할 수 있다. 「바캉스」는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을 바캉스로 하는 세상을 그린다. 「냄새」에선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거대한 오물덩어리가 프랑스 뤽상부르 한 복판에 떨어진 경우를 그리며, 「조종」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왼손 때문에 골치를 앓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엔 이런 아이디어가 열 여덟 개가 있다.

문제는 어떤 아이디어를 힘을 잃지 않고 끝까지 밀고가 설득력 있게 전개시킬 수 있는 능력일 텐데 이 점에서 베르베르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이야기의 재료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뒷받침 된 덕분에 전체 이야기에 맞게 적절히 요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뜻밖의 해답을 찾아내게 하는 게임"에 능숙한 창작자이자, 그 게임을 게임 이상으로 격상시킬 수 있도록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게을리하지 않는 관찰자이자 사색가인 작가 베르베르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개미』『천사들의 제국』같은 전작들에서 인간 세계를 관찰하고 사색함에 있어서 그가 즐겨 사용한 '인류에 대한 외래적 시선'은 이번 작품집에서도 발견된다. '개미'의 관점이 지극히 낮은 곳으로부터 인간을 관찰하는 것이라면 '천사'의 시각은 지극히 높은 곳으로부터 인간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번에 그는 천사뿐만 아니라 외계인의 시선까지 빌려 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본다.

특히 외계인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은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이 작품에서 작가는 다른 행성의 한 과학자가 본 인간들의 관습을 이야기한다. 철저한 객관자가 본 인간은 철근콘크리트로 둥지를 만들며, 저녁마다 파르스름한 빛을 내는 상자(아마도 텔레비전)에 불을 켜고 꼼짝 않고 앉아서 그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별난 관습이 있다. 그들의 관습 중 제일 이상한 것은 지하철 열차 하나에 천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갇히는 일을 매일같이 되풀이하는 것. 신소도 부족하고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운 그 공간에 우글거리는 이유가 뭔지 아직 밝혀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나무'라는 제목은 책에 수록된 「가능성의 나무」 이야기에서 따온 것. '만약 노동 시간을 줄인다면'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미니스커트의 유행이 다시 돌아온다면 같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와 잎사귀가 계속 퍼져 나가는 나무 그림으로 도식화해서 검토해본다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지도 모름을 은유한 것이다. 어쩌면 여기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그러한 예측의 나무 그림을 위한 작은 가지들인지도 모를 듯. 분명한 것은 베르베르의 가능성의 나무 그리기는 진행중이라는 사실. 견고하게 그려진 그의 다음 나뭇가지 그림이 기다려진다.

Posted by blueis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