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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5.05 나무
  2. 2004.04.24 냉정과 열정사이
  3. 2004.03.25 살아간다는 것
  4. 2004.03.25 [영화]Lost in Translation
  5. 2004.03.25 [영화]8명의 여인들 critic djuna..
  6. 2004.03.24 반짝반짝 빛나는
books2004. 5. 5. 17:48



베르베르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이야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단편소설이 아니라 이야기 말이다. 독자들 곁에서 이야기들을 가만가만 들려주고 싶은 기분으로 이 글들을 썼다는 그의 말마따나 소위 말하는 '문학적 완결성'에 집착하지 않는 그의 '이야기들'은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친절한 어느 대머리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편하면서도 그냥 흘려 듣기엔 아까운 메시지가 있다.

지금까지 베르베르의 소설들이 그랬듯이 이 작품집의 이야기들도 기발한 착상에서 시작한다. 「내겐 너무 좋은 세상」에서의 그 세상은 자명종, 실내화, 커피 메이커 같은 모든 물건이 로봇이 되어 지각을 할 수 있고,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말을 할 수 있다. 「바캉스」는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을 바캉스로 하는 세상을 그린다. 「냄새」에선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거대한 오물덩어리가 프랑스 뤽상부르 한 복판에 떨어진 경우를 그리며, 「조종」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왼손 때문에 골치를 앓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엔 이런 아이디어가 열 여덟 개가 있다.

문제는 어떤 아이디어를 힘을 잃지 않고 끝까지 밀고가 설득력 있게 전개시킬 수 있는 능력일 텐데 이 점에서 베르베르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이야기의 재료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뒷받침 된 덕분에 전체 이야기에 맞게 적절히 요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뜻밖의 해답을 찾아내게 하는 게임"에 능숙한 창작자이자, 그 게임을 게임 이상으로 격상시킬 수 있도록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게을리하지 않는 관찰자이자 사색가인 작가 베르베르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개미』『천사들의 제국』같은 전작들에서 인간 세계를 관찰하고 사색함에 있어서 그가 즐겨 사용한 '인류에 대한 외래적 시선'은 이번 작품집에서도 발견된다. '개미'의 관점이 지극히 낮은 곳으로부터 인간을 관찰하는 것이라면 '천사'의 시각은 지극히 높은 곳으로부터 인간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번에 그는 천사뿐만 아니라 외계인의 시선까지 빌려 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본다.

특히 외계인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은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이 작품에서 작가는 다른 행성의 한 과학자가 본 인간들의 관습을 이야기한다. 철저한 객관자가 본 인간은 철근콘크리트로 둥지를 만들며, 저녁마다 파르스름한 빛을 내는 상자(아마도 텔레비전)에 불을 켜고 꼼짝 않고 앉아서 그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별난 관습이 있다. 그들의 관습 중 제일 이상한 것은 지하철 열차 하나에 천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갇히는 일을 매일같이 되풀이하는 것. 신소도 부족하고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운 그 공간에 우글거리는 이유가 뭔지 아직 밝혀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나무'라는 제목은 책에 수록된 「가능성의 나무」 이야기에서 따온 것. '만약 노동 시간을 줄인다면'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미니스커트의 유행이 다시 돌아온다면 같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와 잎사귀가 계속 퍼져 나가는 나무 그림으로 도식화해서 검토해본다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지도 모름을 은유한 것이다. 어쩌면 여기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그러한 예측의 나무 그림을 위한 작은 가지들인지도 모를 듯. 분명한 것은 베르베르의 가능성의 나무 그리기는 진행중이라는 사실. 견고하게 그려진 그의 다음 나뭇가지 그림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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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2004. 4. 24. 22:27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는 아오이와 쥰세이.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때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눴던 이들은 어떤 문제로 다투다 헤어졌다. 지금은 둘다 다른 사람을 사귀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둘의 마음속에는 '아오이가 서른살되는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생생히 살아있다.

오래된 그림을 되살리는 복원사인 쥰세이는 자신을 열정적으로 사랑해주는 메미를 품으면서도 아오이를 떨치지 못한다. 보석을 파는 아오이는 자신을 '데조로(보물)'라 불러주는 완벽한 남자 마빈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에게 아무 것도 털어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는 사이 아오이의 서른번째 생일은 조금씩 다가온다.

두 작가의 의기투합으로 기획된 이 소설은 월간 <가도가와>지에 2년이 넘게 연재되었다. 가오리가 먼저 아오이의 이야기를 실으면 그것을 본 히토나리가 다음으로 쥰세이의 이야기를 싣는 식이다. 주인공에 대한 몇가지 사항만 합의한채 나머지는 그때그때 서로의 글을 보고 빚어나갔다는 얘기다. 노트를 돌려 쓰는 릴레이 소설처럼.

물론 따로 한권씩만 읽어도 아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좀더 스릴있게 읽는 법은 연재가 실렸던 순서대로, 그러니까 아오이의 이야기 한 장을 읽고 다음엔 쥰세이의 이야기 한 장을 읽는 식으로 두 책을 번갈아가며 읽는 것이다. 일본의 두 유명작가가 어떻게 한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썼는지, 한 작가가 툭 던진 조그만 모티브를 다음 작가가 어떻게 받아가는지를 그려보면서 말이다.

아오이와 쥰세이의 이야기를 우리말로 옮긴 사람이 김난주, 양억관 부부 번역가라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두 역자는 게다가 이전에 각각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책을 번역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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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2004. 3. 25. 14:08


'춘생, 살아 있어야 해요' 춘생은 고개를 끄덕였고, 가진은 안에서 울면서 말했다네.
'당신은 우리에게 한 목숨을 빚졌으니, 당신 자신의 목숨으로 갚아주세요.'
춘생이 잠시 서 있다가 말했지.
'알겠습니다.'

'춘생, 자네 살아 있겠다고 약속하게.'
춘생은 몇 걸음 걸어가다가 돌아보며 말했어.
'약속할게요.'

위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간결함, 평범함속에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싶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그의 소설을 풀어나가는 방법을 이미 한번 경험해 봤던 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읽는데는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였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살아간다는 것. 그것을 알려면 우리가 왜 태어났냐는 원론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할듯 싶다. 왜 태어났을까? 당신들은 알고있나? 혹시 한번쯤 가볍게 생각하다 집어치우진 않았나?, 나역시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내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위화 책 서문에서 말하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란 살아있기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뭐 복잡하게 내가 태어난 거대한 사명이니 그런 거창한 말은 일절 사용치도 않고. 단순히 살아있기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살아 있기에 살아간다는 것.

이 소설에 나오는 복귀노인의 회상기에는 그의 일생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간결하게 묘사해놓았다. 정말 읽어가면서 욕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감동도 했다. 그냥 한 사람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머리에 스치듯 경험해봤다고 해야하나? 책을 읽으면 토막토막 보는 내가 이책은 단숨에 읽어버렸다. 조금이라도 흐름을 놓치면 안될것 같은 그런 마력에.

삶의 풍파를 겪어 오는 복귀의 삶에서, 아무래도 그의 작은 행복들보다는 커다란 불행들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다. 도박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딸이 농아가 되고, 아들이 수혈을하다 과다수혈도 숨지고, 딸이 출산하다가 죽고, 아내가 연골병으로 오래지않아 죽고, 사위도, 하나밖에없는 외손주도 죽어버리고. 마지막엔 자신 혼자만 남아있는상황.

자신의 피같은 인척들의 죽음을 눈앞에 지켜보는 이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것도 한두번도 아닌. 전가족이. 기근을 버텨오고, 대혁명기를 거치며 살아오는 복귀노인의 풍파같은 세월속에 나 자신을 던져놓고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사소한 걱정들이 저 넓은 백사장의 작은 모래알갱이처럼 생각이 드는건. 이 소설을 제대로 읽었다는 말일까?

살아간다는 건 쉬운일이 아니다. 하지만 살아만 있다면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때까지 그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을까? 다시 한번 여화의 소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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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s2004. 3. 25. 09:27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 타인에게서 지친 영혼을 위로받기

<처녀자살소동 The Virgin Suicides>(1999)을 보지 못한 국내 관객들에게 소피아 코폴라는 <대부>, <지옥의 묵시록>의 명감독 프랜시스 코폴라의 딸이라는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그것도 <대부 3>에서 어색한 연기로 일관한 '프랜시스 코폴라의 연기 못하는 딸'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1999년 깐느 감독 주간에서 상영되어 호평 받고, 이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던 <처녀자살소동>을 연출한 재능있는 신예 감독이다. 그런 그녀가 4년 만에 두 번째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를 내놓았다.


할리우드의 인기스타 밥 해리스(빌 머레이)는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을 방문한다. 그는 일본의 낯선 문화와 환경에 둘러싸여 단절감과 소외감을 느낀다. 일본 CF 감독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와 겉돌기만 하는 아내와의 전화 통화. 한편,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신부 샬롯(스칼렛 조핸슨)도 유명 사진작가인 남편(지오바니 리비시)을 따라 일본에 왔지만 일 때문에 바쁜 남편과 대화 한 번 나눌 시간이 없다. 또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고민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게 된 밥과 샬롯은 호텔 바에서 만나 서로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숨겨진 외로움을 발견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이해 받지 못하는 소녀들이 등장했던 <처녀자살소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처녀 자살 소동>은 1970년대 미시간 주의 작은 마을에서 사는 다섯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었었다. 다섯 자매는 교사인 부모의 엄격한 청교도식 교육에 0대의 자유를 억압당한다. 소피아 코폴라는 금발머리 다섯 자매의 싱그러운 젊음을 화면 가득히 담아내면서도 그녀들을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그려낸다. 그녀들의 부모는 폭압적이지는 않지만 부드러움으로 위장한 냉혹함을 감추고 있다. 거짓 화해와 위장된 평화 속에서 소녀들은 숨죽이며 살아간 그녀들을 짝사랑하는 마을 소년들의 구출작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스스로의 묵숨을 끊는 것으로 삶을 마감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소피아 코폴라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길로 나아간다. 이해 받지 못하는 새내기 주부 샬롯은 외로움에 지쳐 있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밥과 소통한다. 밥은 중년의 피로와 권태에 빠져 있지만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남자다. 밥은 아버지같은 자상함으로 샬롯의 지친 영혼을 어루만진다. 언뜻 보면 불륜이나 원조교제쯤으로 인식될 수 있는 둘 사이의 묘한 관계는 그러나 세대를 초월하여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으로 형상화된다. 그건 소피아 코폴라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의미이며 인생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밥 해리스를 연기하는 빌 머레이는 단순한 코믹 연기가 아니라 드라마 연기에서도 하나의 경지를 보여준다. 낯선 여행지에 중년의 피로와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도 그 삶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는 어른 된 자의 여유로움은 그대로 그의 나이에 맞춰져 있다. 샬롯 역의 스칼렛 조핸슨도 이제 갓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의 성숙한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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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s2004. 3. 25. 09:25

1939년, 조지 쿠커는 여성 캐릭터들로만 구성된 유명한 브로드웨이 코미디 [여인들]의 영화 버전을 만들면서, 지금 보면 엄청 유치하고 조금은 가혹하게도 보이는 오프닝 크레딧을 디자인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을 캐릭터의 성격을 상징하는 동물들과 병치한 것이다. 주인공 메리를 연기한 노마 셔러는 사슴과, 메리의 남편을 빼앗아간 향수 가게 점원 크리스탈을 연기한 조운 크로포드는 표범으로, 이간질 전문 친구인 실비아를 연기한 로잘린드 러셀은 검은 고양이로, 순진한 유부녀인 페기를 연기한 조운 폰테인은 양으로, 남편 빼앗기 전문 댄서인 미리엄을 연기한 폴렛 고다드는 여우로... 이런 식으로 줄줄 이어진다.

도대체 왜 쿠커는 이런 짓을 했을까? 물론 여기엔 캐리커쳐의 기능이 있다. 애당초부터 <여인들 Women>은 극단적으로 요란한 코미디니까, 이런 식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과장하는 것도 꽤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조금 더 매정한 동기가 숨어 있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쿠커가 <여인들>을 일종의 여자 동물원으로 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자, 한번 따져보자. 쿠커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는 여자들만 등장하는 드문 종류의 영화이다. 쿠커는 엑스트라들도 모두 여자들로 쓰고 심지어 등장하는 동물들도 암컷만 쓰는 식으로 남자들을 공들여 쫓아냈다. 이런 식으로 순수성을 유지했으니, 여성이라는 소재를 몽땅 커버하려는 야망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여인들>에 나오는 여자들은 지구상에서 땅을 디디고 선 여자들의 모든 성격과 타입을 커버하는 견본품인 것이다. 물론 1930년대 할리우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여인들>로 이야기를 시작하냐고? 그건 프랑소와 오종의 <8명의 여인들>이 <여인들>의 대타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종은 원래 <여인들>의 프랑스어 리메이크 버전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줄리아 로버츠가 리메이크 판권을 가지고 통에 야심을 거두고 역시 여자들만 등장하는 로베르 토마의 프랑스어 연극을 대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명의 여인들> 국내 홍보 전단 어딘가에 ‘줄리아 로버츠와 멕 라이언도 탐낸 프로젝트’나 그 비슷한 내용의 문구가 삽입된 건 순전히 이 막연한 연관성 때문이다. 사실 이 두 할리우드 배우들은 오종이 뭘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오종이 <8명의 여인들>을 <여인들>의 리메이크로 만들려고 했다는 건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알 수 있다. 쿠커가 주인공들을 동물들에 비교한 것처럼, 오종은 주인공들을 꽃들에 비교한다. 쿠커보다는 예절을 차린 대우인 셈이다. 그만큼 살짝 더 공정하기도 하다. 쿠커가 <8명의 여인들>을 감독했다면 펑퍼짐한 흑인 하녀인 마담 샤넬은 집돼지나 그만큼 덜 대우받는 다른 동물들에 비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종은 마담 샤넬을 위해 커다란 해바라기를 선사한다. 파니 아르당의 장미나 엠마누엘 베아르의 난에 비해 화려함은 떨어질지 몰라도, 해바라기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꽃이다. 물론 여기서까지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끄집어내고 싶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듯 하다.

<8명의 여인들>은 무슨 영화인가? 한마디로 미스테리 코미디 뮤지컬이다. 눈으로 길이 차단된 산장에 가장인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여덟 명의 여자들이 서로를 의심한다. 이들은 뻔뻔스럽게도 중간중간에 간드러진 프랑스 팝송을 부르며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

왜 뮤지컬이고 추리물일까? 답은 위에서 간단하게 도출해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캐릭터의 전형성이 강한 장르이다. 진부한 1930년대 추리 소설 아무 거나 꺼내 펼쳐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캐릭터들이 등장하자마자 그 인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 지 알 수 있다. 살해당한 부자 노인, 유산을 탐내는 탐욕스러운 친척들, 누명을 뒤집어 쓴 여자 주인공,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집사. 물론 잘난 척이 심한 명탐정과 충실한 조수, 덜떨어진 경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 끝에 뜻밖의 범인이 밝혀지긴 하지만, 대부분 그 반전 역시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 그냥 캐릭터를 한 번 또는 두 번 뒤집는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뮤지컬은 어떤가. 여러분은 진 켈리가 지금까지 그가 출연했던 수많은 뮤지컬 영화들에서 각각 다른 역들을 맡았다고 생각하는가? 프레드와 진저는 어떤가? 여러분은 그들을 독립된 캐릭터들로 기억하는가?

이런 단순함은 프랑수와 오종이 지금 일종의 인형 놀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8명의 여인들>은 인형 놀이의 기록이다. 산장은 한쪽 벽이 열린 예쁜 인형의 집이고, 이 영화를 위해 총동원된 스타들은 모두 예쁜 인형옷으로 차려입은 인형들이다. 혹시 어린 시절에 어떻게 인형을 가지고 놀았는지 까먹은 분들이 있다면 잠시 눈을 감고 과거를 돌이켜보기 바란다. 손때 묻은 인형들이 우리의 손 안에서 생명력을 얻고 살아났을 때 그들이 <소피의 선택>의 메릴 스트립이나 <딥 엔드>의 틸다 스윈튼처럼 군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들은 언제나 몇가지 유형들로 태어났다. 마치 뮤지컬과 추리극의 고정된 캐릭터들처럼 말이다.

이런 정형성은 보다 화려했던 시절에 만들어졌던 클래식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오종은 이런 식의 정형화를 통해 옛 영화들에 나왔던 화려한 여자 배우들의 이미지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이런 일반화에 대한 핑계가 생긴다. 일반화와 단순화는 정리와 분류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쓸데 없이 먼 길을 돌아왔다. 정리와 분류는 조지 쿠커가 <여인들>에서 시도했던 것과 정확하게 같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오종 역시 그의 캐리커쳐들로 전체 여성을 커버하려고 한다. 단지 그가 다루는 여성들은 영화 속의 화사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장르의 환상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리와 분류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정작 개별 유형들에겐 큰 의미가 없다. 이자벨 위뻬르는 성마른 노처녀다. 엠마뉴엘 베아르는 섹시한 하녀다. 파니 아르당은 바람둥이 모험가다. 이들은 모두 문장 하나로 캐릭터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얄팍한 외피만을 부여받는다. 그들이 감추고 있는 근친상간, 살인, 사기, 동성애, 불륜, 열정, 자기 기만, 피해 의식 역시 캐릭터를 최소한의 힘으로 움직이게 돕는 엔진에 불과할 뿐 정말로 깊이 있는 감정이나 동기에 바탕을 둔 어떤 것은 아니다.
동기는 다르지만 결과는 수렴한다. <8명의 여인들>은 종종 심각하게 잔인하다. 아니, 선배인 <여인들>보다 몇 배는 더 잔인하다. <여인들>은 잔혹한 캐리커쳐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애정섞인 농담이기도 했다. <여인들>의 관객들은 얄팍한 캐리커쳐를 보며 웃기도 하지만 종종 캐릭터들에 공감하며 미소짓기도 한다. 하지만 <8명의 여인들>은 차가울 정도로 매정하다. 오종이 사랑하는 건 그가 가지고 놀고 있는 인형들의 표면적인 아름다움과 그들을 양식화된 방식으로 배치하는 동안 얻는 쾌락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종은 이것이 영화적 게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둘을 구별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감독이 실제 인물로 그렸건, 기존 영화의 오마주로 그렸던 우리가 보게 되는 건 모두 스크린 위에 투사된 이미지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이걸 가지고 오종을 비난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카뜨린느 드뇌브, 파니 아르당, 엠마뉴엘 베아르처럼 생긴 인형들이 가득 담긴 인형의 집을 주었다고 치자. 나도 당연히 오종처럼 할 것이다. 나 역시 카트린느 드뇌브 인형과 파니 아르당 인형을 양손에 잡고 뽀뽀 놀이를 하며 한나절을 보낼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방식으로 인형 놀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Posted by blueisland
books2004. 3. 24. 18:06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투명한 사랑 이야기
호모 남편과 알코올 중독 부인... 그리고 그 남편의 애인. 평범하지 않은, 조금 이상할지 모르는 이 세 사람의 사랑이 소설의 축을 이룬다. 호모가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 그리고 그 상대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 자칫 이런 등장인물의 이력만 보면 지리지리하고 어두운 생활이라든가 피터지는 사랑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에쿠니는 그녀만의 독특한 서정성과 문체로 이런 우려를 깨끗이 날려버리며 우리에게 투명한 사랑 이야기를 선사한다.
본문중에..
“아버지,은사자라고 아세요? 색소가 희미한 사잔데 은색이랍니다. 다른 사자들과 달리 따돌림을 당한대요. 그래서 멀리서 자기만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한다는군요. 쇼코가 가르쳐 주었어요. 쇼코는 말이죠, 저나 곤을 그 은사자 같다고 해요. 그 사자들은 초식성에, 몸이 약해서 빨리 죽는다는군요 . 단명한 사자라니, 정말 유니크하죠. 쇼코의 발상은.”
나는 웃었다. 웃으면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한테 이러니 저러니 압력을 받는 편이 훨씬 낫다.
(은사자들/ p131)

Posted by blueis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