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s2004. 6. 22. 18:12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13살 어린 나이에 거리로 나가야만 했던 리(샤를리즈 테론). 밝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던 리는 어느 날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의 주머니 속에 있던 단 돈 몇 달러를 맘껏 써본 후 죽음을 맞을 것을 결심한 리는 비를 피해 들어간 바에서 천진한 소녀 셀비(크리스티나 리치)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순진함에 호감을 느낀 리는 셀비에게 어머니로서 혹은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리의 행복을 다시 거리로 내몰고 우연한 살인 후, 리와 셀비의 사랑은 종말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

<몬스터 Monster>는 샤를리즈 테론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보물이라고까지 칭해지는 샤를리즈 테론의 스크린 첫 등장에서부터 관객들은 숨 죽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빛에 투사된 그녀의 모습에서 이전의 아리따운 할리우드 여배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1989년부터 1년 사이 6명의 남성을 살해하고 전기 의자에 앉은 에일린 워노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몬스터>를 위해 샤를리즈 테론은 체중을 13kg나 늘렸기 때문이다. 불어난 몸과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화사하게 빛나던 샤를리즈 테론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증발해버렸다.

샤를리즈 테론의 빛나는 연기 힘입어 영화는 ‘괴물’처럼 끔찍한 현실을 그려나간다. 빛 속에서 방아쇠를 당기려는 리의 모습에서부터, 셀비와의 비극적 사랑이 빚어낸 엽기적인 행각에 이르기까지 <몬스터>는 시종일관 ‘몬스터’를 그려낸다. 물론 셀비와 함께 하는 롤러장에서의 찰나적 행복함이 존재하긴 하지만 관객들은 그것을 체감하기도 전에 펼쳐지는 음울함에 답답해진다. 그 만큼 패티 젠킨스가 그려낸 <몬스터>는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자본주의 체제의 밑바닥을 체험케 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이 사람을 사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 알레고리의 중심에 리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몬스터>를 보고 있으면 2004년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베를린국제영화제 등이 왜 샤를리즈 테론에게 최고 여배우상을 안겼는지 실감할 수 있다. 영화적 완성도를 떠나 그녀의 충격적인 변신과 어둠 속을 헤매는 괴물로서의 여성성 재현만으로도 <몬스터>는 충분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여기에 <아담스 패밀리>, <버팔로 66>, <슬리피 할로우> 등에서 독특한 연기를 선보여온 꼬마 ‘몬스터’ 크리스티나 리치의 연기도 영화를 어둡게 하는 데에 한 몫 거든다. <몬스터>의 상영이 끝난 후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은 ‘찝찝함’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겨우 가둬 놓은 괴물의 모습을 108분 동안 직접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nkino 이주영기자
Posted by blueisland
images2004. 6. 22. 17:42


보고 싶은 영화..
"킬러들의 수다" 후 그의 영화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Posted by blueisland
images2004. 6. 6. 09:29

▶클릭하면 볼수 있어요..
감동은 없다..
씬의 연결성를 OST로 무마하려했지만 역부족이였다.(느낌에 영화의 80%가 음악이 흘렸다)
엽기적인그녀, 클래식의 에피소드는 오이려 영화를 토막내기만 했다.
곽재용 감독영화라고 느끼는건 단지 OST하나.. 홍콩자본으로 만들어서 그런가 총소리가 유난히 자주들린다..다음엔 클래식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한다.
Posted by blueisland
images2004. 5. 31. 11:04



50 First Dates..
보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녀(루시)를 사랑하는 남자(헨리)이야기다..이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이 아닌가 싶다..사랑하는 루시를 위해 비디오 녹화를 통해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녀를 위하는 헨리의 모습은 정말 로맨틱하다..마지막으로 밖은 추우니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는 말은 정말 루시에 대한 매려인듯 싶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찌 보면 나 또한 단기 기억상실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것같다.. 정확하게 어제를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모든걸 기억하면서 살면 인간이 오래 살지 못할 것같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지우려해도 잊으려해도 잊지 못하는 걸보면 기억이란 참 재미있는 것 같다..
Posted by blueisland
images2004. 3. 25. 09:27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 타인에게서 지친 영혼을 위로받기

<처녀자살소동 The Virgin Suicides>(1999)을 보지 못한 국내 관객들에게 소피아 코폴라는 <대부>, <지옥의 묵시록>의 명감독 프랜시스 코폴라의 딸이라는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그것도 <대부 3>에서 어색한 연기로 일관한 '프랜시스 코폴라의 연기 못하는 딸'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1999년 깐느 감독 주간에서 상영되어 호평 받고, 이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던 <처녀자살소동>을 연출한 재능있는 신예 감독이다. 그런 그녀가 4년 만에 두 번째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를 내놓았다.


할리우드의 인기스타 밥 해리스(빌 머레이)는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을 방문한다. 그는 일본의 낯선 문화와 환경에 둘러싸여 단절감과 소외감을 느낀다. 일본 CF 감독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와 겉돌기만 하는 아내와의 전화 통화. 한편,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신부 샬롯(스칼렛 조핸슨)도 유명 사진작가인 남편(지오바니 리비시)을 따라 일본에 왔지만 일 때문에 바쁜 남편과 대화 한 번 나눌 시간이 없다. 또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고민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게 된 밥과 샬롯은 호텔 바에서 만나 서로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숨겨진 외로움을 발견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이해 받지 못하는 소녀들이 등장했던 <처녀자살소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처녀 자살 소동>은 1970년대 미시간 주의 작은 마을에서 사는 다섯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었었다. 다섯 자매는 교사인 부모의 엄격한 청교도식 교육에 0대의 자유를 억압당한다. 소피아 코폴라는 금발머리 다섯 자매의 싱그러운 젊음을 화면 가득히 담아내면서도 그녀들을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그려낸다. 그녀들의 부모는 폭압적이지는 않지만 부드러움으로 위장한 냉혹함을 감추고 있다. 거짓 화해와 위장된 평화 속에서 소녀들은 숨죽이며 살아간 그녀들을 짝사랑하는 마을 소년들의 구출작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스스로의 묵숨을 끊는 것으로 삶을 마감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소피아 코폴라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길로 나아간다. 이해 받지 못하는 새내기 주부 샬롯은 외로움에 지쳐 있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밥과 소통한다. 밥은 중년의 피로와 권태에 빠져 있지만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남자다. 밥은 아버지같은 자상함으로 샬롯의 지친 영혼을 어루만진다. 언뜻 보면 불륜이나 원조교제쯤으로 인식될 수 있는 둘 사이의 묘한 관계는 그러나 세대를 초월하여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으로 형상화된다. 그건 소피아 코폴라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의미이며 인생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밥 해리스를 연기하는 빌 머레이는 단순한 코믹 연기가 아니라 드라마 연기에서도 하나의 경지를 보여준다. 낯선 여행지에 중년의 피로와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도 그 삶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는 어른 된 자의 여유로움은 그대로 그의 나이에 맞춰져 있다. 샬롯 역의 스칼렛 조핸슨도 이제 갓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의 성숙한 연기를 보여준다





Posted by blueisland
images2004. 3. 25. 09:25

1939년, 조지 쿠커는 여성 캐릭터들로만 구성된 유명한 브로드웨이 코미디 [여인들]의 영화 버전을 만들면서, 지금 보면 엄청 유치하고 조금은 가혹하게도 보이는 오프닝 크레딧을 디자인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을 캐릭터의 성격을 상징하는 동물들과 병치한 것이다. 주인공 메리를 연기한 노마 셔러는 사슴과, 메리의 남편을 빼앗아간 향수 가게 점원 크리스탈을 연기한 조운 크로포드는 표범으로, 이간질 전문 친구인 실비아를 연기한 로잘린드 러셀은 검은 고양이로, 순진한 유부녀인 페기를 연기한 조운 폰테인은 양으로, 남편 빼앗기 전문 댄서인 미리엄을 연기한 폴렛 고다드는 여우로... 이런 식으로 줄줄 이어진다.

도대체 왜 쿠커는 이런 짓을 했을까? 물론 여기엔 캐리커쳐의 기능이 있다. 애당초부터 <여인들 Women>은 극단적으로 요란한 코미디니까, 이런 식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과장하는 것도 꽤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조금 더 매정한 동기가 숨어 있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쿠커가 <여인들>을 일종의 여자 동물원으로 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자, 한번 따져보자. 쿠커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는 여자들만 등장하는 드문 종류의 영화이다. 쿠커는 엑스트라들도 모두 여자들로 쓰고 심지어 등장하는 동물들도 암컷만 쓰는 식으로 남자들을 공들여 쫓아냈다. 이런 식으로 순수성을 유지했으니, 여성이라는 소재를 몽땅 커버하려는 야망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여인들>에 나오는 여자들은 지구상에서 땅을 디디고 선 여자들의 모든 성격과 타입을 커버하는 견본품인 것이다. 물론 1930년대 할리우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여인들>로 이야기를 시작하냐고? 그건 프랑소와 오종의 <8명의 여인들>이 <여인들>의 대타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종은 원래 <여인들>의 프랑스어 리메이크 버전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줄리아 로버츠가 리메이크 판권을 가지고 통에 야심을 거두고 역시 여자들만 등장하는 로베르 토마의 프랑스어 연극을 대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명의 여인들> 국내 홍보 전단 어딘가에 ‘줄리아 로버츠와 멕 라이언도 탐낸 프로젝트’나 그 비슷한 내용의 문구가 삽입된 건 순전히 이 막연한 연관성 때문이다. 사실 이 두 할리우드 배우들은 오종이 뭘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오종이 <8명의 여인들>을 <여인들>의 리메이크로 만들려고 했다는 건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알 수 있다. 쿠커가 주인공들을 동물들에 비교한 것처럼, 오종은 주인공들을 꽃들에 비교한다. 쿠커보다는 예절을 차린 대우인 셈이다. 그만큼 살짝 더 공정하기도 하다. 쿠커가 <8명의 여인들>을 감독했다면 펑퍼짐한 흑인 하녀인 마담 샤넬은 집돼지나 그만큼 덜 대우받는 다른 동물들에 비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종은 마담 샤넬을 위해 커다란 해바라기를 선사한다. 파니 아르당의 장미나 엠마누엘 베아르의 난에 비해 화려함은 떨어질지 몰라도, 해바라기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꽃이다. 물론 여기서까지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끄집어내고 싶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듯 하다.

<8명의 여인들>은 무슨 영화인가? 한마디로 미스테리 코미디 뮤지컬이다. 눈으로 길이 차단된 산장에 가장인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여덟 명의 여자들이 서로를 의심한다. 이들은 뻔뻔스럽게도 중간중간에 간드러진 프랑스 팝송을 부르며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

왜 뮤지컬이고 추리물일까? 답은 위에서 간단하게 도출해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캐릭터의 전형성이 강한 장르이다. 진부한 1930년대 추리 소설 아무 거나 꺼내 펼쳐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캐릭터들이 등장하자마자 그 인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 지 알 수 있다. 살해당한 부자 노인, 유산을 탐내는 탐욕스러운 친척들, 누명을 뒤집어 쓴 여자 주인공,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집사. 물론 잘난 척이 심한 명탐정과 충실한 조수, 덜떨어진 경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 끝에 뜻밖의 범인이 밝혀지긴 하지만, 대부분 그 반전 역시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 그냥 캐릭터를 한 번 또는 두 번 뒤집는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뮤지컬은 어떤가. 여러분은 진 켈리가 지금까지 그가 출연했던 수많은 뮤지컬 영화들에서 각각 다른 역들을 맡았다고 생각하는가? 프레드와 진저는 어떤가? 여러분은 그들을 독립된 캐릭터들로 기억하는가?

이런 단순함은 프랑수와 오종이 지금 일종의 인형 놀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8명의 여인들>은 인형 놀이의 기록이다. 산장은 한쪽 벽이 열린 예쁜 인형의 집이고, 이 영화를 위해 총동원된 스타들은 모두 예쁜 인형옷으로 차려입은 인형들이다. 혹시 어린 시절에 어떻게 인형을 가지고 놀았는지 까먹은 분들이 있다면 잠시 눈을 감고 과거를 돌이켜보기 바란다. 손때 묻은 인형들이 우리의 손 안에서 생명력을 얻고 살아났을 때 그들이 <소피의 선택>의 메릴 스트립이나 <딥 엔드>의 틸다 스윈튼처럼 군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들은 언제나 몇가지 유형들로 태어났다. 마치 뮤지컬과 추리극의 고정된 캐릭터들처럼 말이다.

이런 정형성은 보다 화려했던 시절에 만들어졌던 클래식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오종은 이런 식의 정형화를 통해 옛 영화들에 나왔던 화려한 여자 배우들의 이미지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이런 일반화에 대한 핑계가 생긴다. 일반화와 단순화는 정리와 분류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쓸데 없이 먼 길을 돌아왔다. 정리와 분류는 조지 쿠커가 <여인들>에서 시도했던 것과 정확하게 같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오종 역시 그의 캐리커쳐들로 전체 여성을 커버하려고 한다. 단지 그가 다루는 여성들은 영화 속의 화사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장르의 환상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리와 분류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정작 개별 유형들에겐 큰 의미가 없다. 이자벨 위뻬르는 성마른 노처녀다. 엠마뉴엘 베아르는 섹시한 하녀다. 파니 아르당은 바람둥이 모험가다. 이들은 모두 문장 하나로 캐릭터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얄팍한 외피만을 부여받는다. 그들이 감추고 있는 근친상간, 살인, 사기, 동성애, 불륜, 열정, 자기 기만, 피해 의식 역시 캐릭터를 최소한의 힘으로 움직이게 돕는 엔진에 불과할 뿐 정말로 깊이 있는 감정이나 동기에 바탕을 둔 어떤 것은 아니다.
동기는 다르지만 결과는 수렴한다. <8명의 여인들>은 종종 심각하게 잔인하다. 아니, 선배인 <여인들>보다 몇 배는 더 잔인하다. <여인들>은 잔혹한 캐리커쳐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애정섞인 농담이기도 했다. <여인들>의 관객들은 얄팍한 캐리커쳐를 보며 웃기도 하지만 종종 캐릭터들에 공감하며 미소짓기도 한다. 하지만 <8명의 여인들>은 차가울 정도로 매정하다. 오종이 사랑하는 건 그가 가지고 놀고 있는 인형들의 표면적인 아름다움과 그들을 양식화된 방식으로 배치하는 동안 얻는 쾌락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종은 이것이 영화적 게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둘을 구별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감독이 실제 인물로 그렸건, 기존 영화의 오마주로 그렸던 우리가 보게 되는 건 모두 스크린 위에 투사된 이미지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이걸 가지고 오종을 비난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카뜨린느 드뇌브, 파니 아르당, 엠마뉴엘 베아르처럼 생긴 인형들이 가득 담긴 인형의 집을 주었다고 치자. 나도 당연히 오종처럼 할 것이다. 나 역시 카트린느 드뇌브 인형과 파니 아르당 인형을 양손에 잡고 뽀뽀 놀이를 하며 한나절을 보낼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방식으로 인형 놀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Posted by blue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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